민족영웅 손기정 스토리 2

손기정 선수 태극기를 처음 보다.

손 선생이 태극기를 난생 처음 본 것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바로 직후였다.  당시 두부 공장을 하며 베를린에 살던 안중근 선생의 사촌동생 안봉근이 손선생과 3위를 차지한 남승룡 선생(1912~ 2001)을 은밀히 집으로 부른 것이다.  안봉근은 그들을 다짜고짜 서재로 데려 가더니 “이것이 태극기다. 우리 조국의 국기다.” 라며 벽에걸린 ‘아름다운 무늬’를 가리켰다.

손선생은  “그때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며 한수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고 말했다.  그 말할 수 없는 감격에 온몸이 감전됐고 우리 민족은 저 태극기처럼 면면히 살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

1932년 손선생은 신의주에 있는 동익상회 점원으로 일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압록강변을 달렸다.  그러다 그해 봄 제 2회 동아마라톤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

숙소는 동익상회 주인인 공정규 씨의 배려로 마침 그의 저택이 있는 광화문 부근에 잡았다.  공정규씨는 공안과 원장과 한글 타이프라이터 발명가로 유명한 공병우 박사의 부친이다.

손기정은 1932년 제2회 동아마라톤 대회 2위 입상을 계기로 그해 스무살의 나이로 육상 명문 서울의 양정보고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후부터 그의  타고난  달리기 재능을 마음껏 펼쳤다.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하였으며 우승 기록이 대부분 세계 신기록 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 총독부는 조선체육회의  손기정 마라톤 제패기념  체육관 건립 모금 운동을 중지 시켰으며, 늘 사복형사가 따라 붙었다. 형사들의 감시가 계속되자 자퇴를 하고 “다시는 육상을 하지 않는다” 는 조건으로 일본 메이지 대학에 들어갔다.

손기정 선생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16일 후인 1936년 8월 25일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이 터졌다.  손기정의 우승은 당시 일제 식민지였던 한반도 땅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거의 한달 내내 전국이  ‘기쁨의 눈물 바다였다’ 하지만 조선 사람이면 누구자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우고 싶어 했다.

<동아일보>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사진에서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버리고 내보내 한국인들의 아픔과 분노를 표시했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 체육기자 이길용, 사회부장 현진건  등이 투옥 되었고,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로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배편으로 귀국하다 싱가포르에서 이 사건 전말을  전해들은 손기정은  “나의 심경을 대변해 준  동아일보에 감사한다 . 고초를 겪고있는 기자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 고 말했다.

해방후 동아일보에 복직된 이길용은  “운동 기자 생활 16년 ! 이처럼 흥분되고 기꺼운 때가 언제 있었으랴 이러던 나는 이 나라의 아들인 손 선수를 왜놈에게 빼앗기는 것 같은 느낌이, 그 유니폼 일장 마크에서 엄숙하게도 충격을 받았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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